HBM 공급 부족이 엔비디아·AMD 칩 설계를 바꾸는 이유

엔비디아가 자기 손으로 설계한 칩의 사양을 스스로 낮추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메모리를 원하는 만큼 구하지 못해서다. HBM 공급 부족이 세계 최강 AI 칩 회사의 설계도까지 흔들고 있는 셈이다.

보통은 반대다. 칩 설계사가 사양을 정하면, 메모리 회사가 거기에 맞춰 제품을 만든다. 그런데 지금은 메모리 쪽이 갑이 됐다. 필자가 보기엔 이 역전 현상이야말로 지금 반도체 업계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변화다.

HBM 공급 부족,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HBM은 D램 여러 개를 수직으로 쌓아 올려 만드는 고대역폭 메모리다. AI 가속기가 데이터를 빠르게 주고받으려면 이 메모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이 시장에 심상치 않은 신호가 잇따르고 있다.

2026년 1분기 D램 가격은 분기 기준 최대 98%까지 급등했다. 역대 최고 상승폭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세 회사의 2026년 HBM 생산량은 이미 완판된 상태다.

새 생산 설비는 2027~2028년에야 가동된다. 그 사이 공백을 메울 방법이 마땅치 않다. AI 모델을 만드는 기업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은 메모리를 요구하고 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설명이다.

엔비디아·AMD가 칩 사양까지 낮추는 이유

헤럴드경제 보도에 인용된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내년 출시할 차세대 가속기 ‘루빈 울트라’의 메모리 구성을 재검토하고 있다. 원래 계획은 12단으로 쌓은 HBM4E였다.

그런데 지금은 8단 HBM4E, 12단 HBM4, 8단 HBM4까지 여러 대안을 함께 검토 중이라고 알려졌다. 이유는 HBM4E의 인증 일정과 수율 확보가 불확실해서다.

AMD도 비슷한 고민을 내비쳤다.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는 메모리 가격과 총소유비용 이점이 크지 않다면 구성을 조정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AMD의 신형 가속기 MI455X는 432GB의 HBM4를 탑재했지만, 여지를 남긴 셈이다.

결국 HBM 공급 부족이 심해질수록, 빅테크의 선택지는 ‘최고 사양이냐 확보 가능한 사양이냐’로 좁혀진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게 AI 하드웨어 로드맵 자체를 늦출 수 있는 위험 요인이라고 본다.

사양별 격차, 표로 보면 더 뚜렷하다

어떤 구성을 택하느냐에 따라 성능 차이가 상당하다. 아래 표로 정리해봤다.

구성 적층 단수 입출력 속도 공급 안정성
HBM4E 12단 12단 14~16Gbps 낮음 (인증·수율 불확실)
HBM4 12단 12단 11~12Gbps 중간
HBM4 8단 8단 11~12Gbps 상대적으로 높음

표를 보면 확인되는 사실이 있다. 사양을 한 단계 낮출 때마다 성능은 떨어지지만, 대신 확보 가능성은 높아진다. 지금 빅테크들은 이 trade-off 앞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삼성·SK하이닉스의 전략적 대응

메모리 회사 입장에서는 이 국면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협상력을 극대화할 기회다. 실제로 두 회사는 2026년 7월 미국 기업들과 대규모 선도구매계약을 잇달아 체결했다.

  •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와 약 750억 달러(SK그룹 전체 기준) 규모 계약을 맺었다.
  • 삼성전자는 브로드컴과 200억 달러 규모로 HBM4·HBM4E 공급 및 첨단 패키징 협력에 나섰다.
  • 두 계약을 합치면 950억 달러에 이르며, 계약 기간은 2030년까지다.

이 계약 구조에 대해서는 테크타임스 보도가 ‘선도구매계약’이라는 표현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이 구조는 투자가 아니라 ‘선도구매계약’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새 생산 설비를 짓기 전에 확실한 수요부터 확보했다. 엔비디아와 브로드컴은 불안정한 현물시장 대신 장기 공급망을 택했다.

필자가 보기엔 이 계약 구조 자체가 지금 메모리 업계의 힘의 균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겠다는 쪽이 몇 년 치 물량을 먼저 약속해야 하는 시장은 흔치 않다.

이런 대규모 인프라 재편은 반도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혼다·닛산이 SDV 소프트웨어 동맹을 다시 맺은 사례에서도 보듯, 산업 전반에서 기술 표준과 공급망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IT-SUE의 시각

이번 HBM 공급 부족 국면에서 필자가 가장 흥미롭게 본 대목은 ‘누가 갑이냐’가 뒤바뀐 순간이다. 지금까지 반도체 업계에서 설계 주도권은 늘 엔비디아 같은 팹리스 기업 쪽에 있었다.

그런데 메모리 공급이 병목이 되자,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오히려 가격과 물량 결정권을 쥐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이 힘의 이동이 일시적 현상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본다.

2027~2028년 새 설비가 가동되기 전까지는 이 구도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 사이 한국의 두 메모리 기업은 ‘세계 AI 인프라의 문지기’라는 위치를 당분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지위가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급이 정상화되면 협상력은 다시 칩 설계사 쪽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열어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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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뉴스를 보다 보면 ‘미래가 정말 코앞에 왔구나’ 싶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그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우리에겐 어떤 기회가 될지 궁금해서 이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 기술의 흐름을 함께 따라가며, 다가올 미래를 조금 더 선명하게 그려보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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